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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름유래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성곶면 일리라 했다가 1906924일 칙령 제49호에 따라 안산군 성곶면 일리로 되었으며 191431일 부령 제 111호에 의거 수원군 반월면 일리로 개칭되었고, 그 후 1949815일 대통령령 제 161호에 따라 화성군 반월면 일리가 되었다. 이어 198611일 법률 제 3798호에 의거 안산시로 승격되면서 반월동으로 1991년 11월 18일 안산시 조례 제416호에 의거 반월동에서 일동으로 분동, 2004년 7월 1일 안산시 조례 제1123호에 의거 다시 일동에서 분동되어 오늘의 이동이 되었다.

 일동은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성곶면으로 안산군 군내면과 경계를 이루었던 곳이다. 일동은 웃말, 응단말, 기와집말 등을 통칭해 구렁골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이곳이 명당지로 좌청룡이 완연한 곳이기 때문이다. 구렁골은 본래 단성 이씨의 세거지이나 조선 말엽에 김수근, 김병학, 김병국, 김정규, 김용진 등 안동김씨 세도에 밀려 안동 김씨의 세장지로 되었다가 신도시 개발(1979)때 이들의 묘는 화장되었고, 신도비와 묘역에서 출토된 18명의 남여 복식은 온양 민속박물관에 의해 수습되었다. 이들 유물을 가지고 동 박물관에서는 개관 11주년 기념으로 19891025일부터 1126일까지 안동김씨분묘출토복식전을 열었다. 특히 근세 한국화 화가로 유명했던 김용진(金容鎭)의 구룡산인(九龍山人)이란 아호는 이곳 지명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동의 예전 마을명칭
아랫말(선촌)
일리(구렁골)에서 가장 아래에 있던 마을로 조선 시대에는 배가 이 마을까지 들어왔다 하여 선촌(船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37년 수인선 부설때 이곳에 驛舍(일리역)를 지었다가 지하철 4호선 공사때 폐사되었다.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하여 성태산 당집에서 당제(堂祭)를 지냈다.
아랫말은 어촌(漁村)이라 대성은 없었으며, 호수는 40여 호로 1979년 폐동된후 택지로 조성되어 1986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현재는 구룡체육관, 매화초교 등이 위치해 있으며 이곳을 「매화동」이라 칭한다.
응단말
웃말과 아랫말 사이에 산(안산)이 있어 해가 늦게 뜨는 마을이라 하여 「응단말」이라 챙했다. 함안 이씨 누대의 세거지였던
응단말은 15가구가 있었으나 1978년 폐동된 후 주택지로 조성되어 1986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폐동 전에는 해마다
음력 7월1일에 응단말 뒤에 있는 안산 기슭에서 서낭제를 지냈다.⇒현재는 이동 22통~24통 주변이다.
고잔
청주 한씨, 전주 이씨 등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음택이와 조구나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바닷가 연안으로 곶(串)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고잔(古棧)”이라 칭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구라(사동)에 포구가 생기면서 바닷물이 끊겼으며, 그후 농경지로
변모되었음. ⇒ 현재는 신도시가 되었음.
독안
고잔 서북쪽으로 독처럼 오목하게 생긴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이곳은 풍수로 보아 좌청룡에 속하는데 예전에는 마을 서남쪽에 있는 산 능선을 따라 소나무가 울창해 마을의 풍취가 아름다 웠다고 한다. ⇒현재는 신도시가 되었음.
바라지
본래는 붉은섬에 속했던 마을로 붉은섬 동쪽에 있다. 이곳은 바닷물이 들어오면 수문이 닫히고 바닷물이 나가면 바라지므로
「바라지」라 칭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구라(사동)에 포구가 생기자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 현재는 신도시가 되었음.
붉은섬
「조구나리」 서남쪽 마을로, 취락이 형성되기는 1962년 이은구(김포 출신), 최구완(황해도 출신), 원충희(당진 출신) 등이 입주하면서부터이다. 마을 전체가 안산시 이동 505번지 일대에 속하는데 풀이 자생할 수 없을 만큼 토질이 붉을 뿐만 아니라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있는 마을 뒷산이 흡사 섬 같아 보여 「붉은섬」이라 불렀다 한다. 이 마을 앞에는 유명한 붉은섬 낚시터가 있었다.
⇒현재는 신도시가 되었음.
양지편
「음택이」 동북쪽으로 본래는 「고잔」에 속했던 마을이라고 한다. 남향받이에 자리잡은 마을이 므로 「양지편(陽地便)」이라고 불렀다.⇒현재는 신도시가 되었음.
역전
1937년 수인철도 부설과 함께 일리 驛舍가 생기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신도시 개발 전에는 역전 에 방앗간, 대장간 등 3집이 있었으나 1980년 폐동되어 원주민들은 일동으로 이주했고 민가가 있던 지역은 도로로 편입되었다. 「조미」 동남 쪽에 있던 마을이다.
음택이
「음택이」는 삼태기처럼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청주 한씨, 전주 이씨 등의 세거지로 「고잔」동남쪽에 있었다.
⇒ 현재는 신도시가 되었음.
조구나리
성포동 성머리나루와 함께 어업의 전진기지였으나 한국전쟁 직후 구라(사리)에 포구가 생기면서 농촌으로 변모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광주유수가 이 지역의 조세(租稅)를 싣고 인천-한강을 경유 하여 관가에 바쳤다 하여 「조공(租貢)나루」라 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조구나리」로 변음 되었다. 「조구나리」는 청주 한씨, 전주 이씨 등이 세거해 온 마을로 1980년 취락구조로 개선된 취락이라 하여「취락마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안산시 가족계획 시범마을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신도시 가 되었음.
조미
「조미」는 양지편 동남쪽에 있던 마을이나 신도시 개발에 따라 1985년 폐동된 후 한대앞역이 생겼다. 이곳은 성포동의 「성머리」, 「독주골」과 이동의 「조구나리」, 「양지편」 주민들이 수인선 일리역을 가자면 반드시 거치는 교통의 요충지여서 주막이 번성했다.⇒ 현재는 신도시가 되었음.